우리고장

직산광산과 입장초등학교의 관계

맘대로11 2012. 12. 15. 19:14

 

직산 광산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와 시장리, 성거읍 천흥리 일대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던 직산광산은 입장면을 탄생시켰고 안성선이 생기는 계기가 되어

입장역이 생겼고 입장초등학교가 탄생하는데 지대한 역활을 하였습니다.

직산광산은 이 지역 일대의 경제규모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붉은색 지역이 지하로 금광을 채굴한 지역이며 분홍색으로 된 지역은 사금을 채취하던 지역입니다.

금배-금을 채취하기 위하여 논 또는 평지의 땅을 파면 물이 고이기에 여기에 배를 띄워서 금을 채취하는 채광선임.

 

 

일본인이 운영하던 직산광산은 입장면에 있었습니다.

금을 채취하던 지역은 광대했습니다.

 

 

입장면 시내에도 금배를 띄워서 금을 채취하였으니까요.

 

"한말에 미국인들에 의해 채광되기 시작한 금광이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들까지 진출하여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시장리·도림리 일대에 금방아간을 비롯한 골든타운이 형성되었다.

양대리 금방아간 주변에는 헌병주재소·감리교회·광명학교·금광회사 사택들이 들어섰고,

위례산 줄기마다 파기만 하면 금이 나오는 한 시대였다.

 

사금 채취도 활발해서 입장시내 주변들판과 냇가마다 파면 금이요, 모래를 일기만 하면 노다지를

줍던 황금의 홍수시대를 이루었었다.

 

어떤이는 순금을 한 자리에서만 일곱 초롱을 캐내는 행운을 얻어 기와집이 7채에 삼륜오토바이와

경주마까지 자가용으로 쓰며 일본인 경찰서장·군수의 부임인사를 앉아서 받는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일본 동경유학생들도 여럿이었는데, 방학에 귀향차 천안역에 내릴 때는

서장·군수·역장이 사각모에 긴 망토를 입은 유학생 앞에 도열하여 맞이하는 진풍경도 유명하다.

 

고전무용, 국악, 창을 배운 권번출신 기생들이 하장리 명월관을 비롯한 각 요정·술집에서 풍류를

자랑하며 성황을 누리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 입장향우회가 1992년 발간한 위례산성에서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입장면은 일제 강점기 말기까지 채광산업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광복과 더불어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들이 돌아오고 6.25전쟁이 터지면서 안남미와 밀가루를

배급받아 아침 저녁 나물죽과 수제비로 끼니를 때우는 어려운 시절이 시작된다.

일제 말기 무렵 입장에 가면 노다지를 캘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꿈을 이룬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출처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785

----------------------- * --------------------------------

 

稷山은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주둔지역으로 일찍부터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으로

경부철도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직산광산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광산으로 1896년(건양 1)에는

농상공부에서 금광특파원을 파견하였고‚ 1898년(광무 2)부터는 궁내부에 이속되어 내장원의

관장아래 운영되었다.

이러한 직산지역의 내력으로 보아 본책의 작성연대로 기록되어 있는 丁酉年은 1897년(광무 1)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 * -----------------------------

 

삼남의 관문이라 불리어 온 천안지역의 개명개화 교육운동은 1901년부터 일어난다.

 

19037월에 민족의 선각자 윤치호 박사가 천안 군수로 부임하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개명 교육운동은 활발했다.

당시 천안군, 목천군, 직산군 내에는 서당이 79곳이 있어 서당 한문 선생 79, 학생들이 456명이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학생들은 양반자재들이었다.

 

1884년에 한글이 국문으로 발표되면서 언문이라 무시당한 우리글 한글을 상반 남녀 누구나 배울 수

있게 되었다.

1901년 직산군에서는 노승욱이 부교원으로 처음 임명 받았고, 민철훈 선생이 사립경위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천안군은 안기선 군수, 이민창 선생이 영진학교를 설립했다.

목천군은 병천 지령리교회를 유중무 선생, 조인원 선생, 수신 장명학교는 김구웅 선생,

목천 보명학교는 목천 군수 남계석 선생, 이범신 선생, 박동희 선생, 조한묵 선생이 설립했다.

 

감리교 선교지역인 천안지방은 윌리암 테일러, 베어러, 사프, 스웨러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천안읍교회(서릿말), 병천 지령리교회(매봉), 수신 장명교회, 북면 매송교회, 성환 율금리교회,

입장교회, 양대교회에서, 성공회는 천안부대교회, 병천교회에 야학교, 주일학교, 여성학교를

운영하였다.

 

기독교는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글을 알지 못하여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한 눈을 뜨게 하였다.

한글을 깨우치고 한글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 자주독립 역사를 알게 하였다.

한글 성경번역과 한글교육은 암울한 시대를 개화하는 민족 개명운동이었다.

 

그리고 지역 유지들이 앞장서 사립학교들을 다투어 일으켰다.

직산공립소학교(1901), 목천 홍호, 병천 진명, 수신 장명(1902), 성환 의성, 홍호, 천안 영진(1906),

천안 부대성공회, 직산 경위, 목천 보명(1907), 목천 병진, 병천 신명(1908), 천안 북일(1910),

목천 록농, 입장 양대 광명(1911) 그리고 천안공립보통학교(1911), 직산공립보통학교(1912),

목천보통학교(1913)가 설립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천안교육 실상을 보고한 내용이다.

일본인 공립심상소학교, 천안 2학급 학생 54

성환 1학급 학생 29, 입장 1학급 일본 학생 18

교사가 각 2명이다.

조선인 일반 사립학교 2개교, 기독교사립학교 2개교

학생 남자 102, 여자 6

조선인 공립보통학교 천안, 성환, 입장 3개교

학생 남자 347명이다.

연령은 최고 21세부터 27, 최소 8세부터 10세이다.

천안군 인구는 22,700, 직산군 22,960, 목천군 30,000명이었다.

 

그리고

외국인은 일본인 천안 434, 중국인 37, 직산군 일본인 408, 중국인 86, 영국인 2,

목천군 일본인 44, 중국인 17명이었다.

1914년 목천군, 직산군, 천안군이 통합되어 인구 75,660명 천안군 시대가 된다.

또한 연도별 지역인구를 살펴본다.

1955년 구 천안군 지역 49,000, 구 목천군 지역 61,000

구 직산군 지역 46,000명 계 144,000

1980년 구 천안군 지역 120,000, 구 목천군 지역 51,000

구 직산군 지역 58,000명 계 231,000

1990년 구 천안군 지역 211,000, 구 목천군 지역 44,000

직산군 지역 57,000명 계 313,000

2000년 구 천안군 지역 285,000, 구 목천군 지역 52,000

구 직산군 지역 79,000명 계 417,000

2010년 구 천안군 지역 421,000, 구 목천군 지역 58,000

구 직산군 지역 89,000명 계 570,000명으로 발전됐다.

 

2011년 현 천안시는 초등학교 69개교, 중학교 28개교, 고등학교 21개교, 대학교 12개교로 발전됐다.

 

2011년 인구는 58, 초등학생 43,268, 중등학생 25,930, 고등학생 24,678, 대학생 74,618명이다.

 

1914년 천안, 직산, 목천 인구 75,000명이 100년 후 2011년 오늘 천안시 인구는 1060만 이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2013년이면 천안시 승격(1963) 50주년이 된다. 태조 왕건 후삼국통일(936) 성업 1,077주년이 된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天安의 역사 중심에서 1910년을 되돌아 본.

 

 

천안역사문화연구실

실장 김 성 열

 

 

 

1919년 3월 28일 박창신 등의 주도로 직산금광 광부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118-1   (도로명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성로 1801) 광산터에 한국트로닉스 건물이 세워져 있으며 일부 광산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1919년 3월 20일 입장면 양대리에서

양대광명보통학교 학생 및 직산 금광회사 광부 등 700 여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9년 4월 27일 기념 사업회에서 기념비를 세웠다.


천안시내를 거쳐 단국대학교 옆길로 북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입장면 소재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10분쯤 가면 양대리 입장 기미독립만세기념탑이 마을 중심부에 서있다.
높이 9m의 이 기념탑은 기미년 3월 20일 양대리 광명학교 여학생의 시위 이후, 3월 28일 당시

직산의 금광 광부들이 궐기한 이 시위는 충남 최초의 순국자가 날 정도로 격렬했다 하는데,

이 시위는 4월 1일 병천 아우내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기미년 당시만 하더라도 금광이 있어 가장 번화했던 양대리는 당시에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왔다 하며,

우체국, 병원 등의 시설이 있던 곳이라 한다.

당시의 직산 광산은 평안북도 운산 금광과 더불어 한국의 2대 광산에 비견되었으니,

현재 남아있는 모습만으로 만세운동의 규모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외에도 입장면과 근접해 있는 성거읍 천흥리 일대에도 큰 규모의 광산이 있었다.

오색당리와 천흥리 일대가 금광을 채취하던 곳이었다.

 

*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직산광산으로 인하여 개인 광산들이 생긴 것까지 포함한 것 입니다.

금광맥1개주는 금광 동굴 1개를 말한고 하네요.

당시 시장리나 기타 지역에는 이와 유사한 것이 많았습니다.

 

위 지도에서 보듯이 금을 채취했던 지역이 엄청나게 커서 직산광산의 규모를 알 수가

있습니다.

직산광산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경제가 발전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입되었으며

학교와 우체국, 저수지등이 생기고 전기가 들어오고 수로를 관리하는 곳과 한전이

들어 왔었습니다.

기차길이 놓이면서 입장역은 이 지역의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864년 - 흥선대원군이 외국인에게 광업권 특허 허가. 직산광산 탄생
1914년 - 행정구역상 직산군 일부와 안성군의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안성군 입장면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천안군 입장면으로 탄생
1925년 11월 1일 - 천안 ~ 안성간 철도 개통 - 안성선
1928년 4월 16일 - 입장공립보통학교 개교

                          (입장초등학교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하장4길 19)

1936년 9월 30일 - 도하 간이학교 개설 (충남 천안군 입장면 도하리)
1946년 9월 25일 - 입장국민학교 양대 분교장 설립인가 (충남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28번지)
1947년 9월 16일 - 도하국민학교 개교 (충남 천안군 입장면 도하리) 
1949년 12월 1일 - 양대국민학교 승격 인가 (충남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28번지)

1955년 4월 27일 - 입장중학교 설립인가
1955년 6월 21일 - 입장중학교 개교 및 제 1회 입학식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연곡로 36번지(유리197번지)

1957년 7년 27일 - 양대 초등학교 입장면 하장리 18번지 현 장소로 이전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하장리 18)

1963년 1월 1일 - (천안군 조례1084호 1988.12.31) 도하리를 성환읍에 편입.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연암로 382 도하초등학교)

'우리고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정원 화수목  (0) 2022.10.14
위례산 등산로  (0) 2013.08.11
입장역  (0) 2012.12.15
안성선 [安城線]  (0) 2012.12.15
호당리를 품은 눈덮힌 위례산  (0) 2010.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