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慰禮城은 어디인가?

맘대로11 2009. 4. 4. 13:40

온조(溫祚)가 첫 도읍지로 사용한 위례성(慰禮城)의 위치에 대하여 한강 이북이라는 설과 한강 이남이라는 설로 견해가 갈린다.

고려 때부터 조선후기까지는 한강 이남이라는 설 그 중에서도 직산(稷山)에 있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직산현은 옛 명칭이 위례성이고, 온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도읍하였다고 적혀 있다.

삼국유사에는 "위례성은 지금의 직산이다(彌鄒忽仁州尉禮城今稷山)"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분석해 보면 온조는 재위 13년에 한수 이남으로 이동하였다. 따라서 재위 13년 이전에는 온조가 수도로 사용한 위례성은 한수 이북에 있었다.

위례성의 의미를 살펴본다.

위례성의 위(慰.尉)는 하늘(위=上.高)에 있는 해를 가리킨다.

고대에 독립국의 왕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하였는데, 이들은 해님을 뜻하는 “不”, “高”, “尉”, “白”, “解” 등 글자나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辰(龍)”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복속국의 왕은 “馬”, “蛙” 등 글자를 넣은 명칭을 사용하였다. 온조가 사용한 "위"는 해님의 아들을 뜻하는 글자로서 달님의 아들을 뜻하는 마한(馬韓)이나 월지(月支)보다 상위에 있는 글자이다. 그리고 “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는 글자이다. 즉 위례는 천제의 아들이 있는 무리를 뜻한다.

온조는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위"자를 사용하므로써, 한수 이남의 마한(馬韓)이나 한수 이북의 낙랑(樂浪)과 동등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렸다. 이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祚:天子의 자리)이라는 뜻의 "온조(溫祚)"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온조는 백제(百帝)와 같은 맥락의 칭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는 재위 13년에 모 소서노가 죽는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한수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온조가 한수 이남으로 이동한 후 도읍지를 둔 곳에 대하여 삼국유사에는 직산으로 적혀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마한의 동북땅이라고 적혀 있다.

직산이 마한의 동북땅이라면 당시 마한의 도읍지인 금마산은 직산의 서남 방면인 예산이나 홍성 금마 방면이 된다. 그러나 이병도씨는 마한(馬韓)이 있었는 금마산(金馬山)이 직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직산 위례성은 사실은 온조가 사용한 궁성이 아니고 마한이 사용한 궁성이라고 주장하고, 직산 부근에 궁 명칭이 들어간 지명이 많다는 것을 그 방증으로 들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는 마한으로부터 동북땅 백리를 봉 받고 직산에 궁성을 두었으나 다음해 한강 남쪽으로 궁성을 옮겼다. 조선시대는 그곳을 하남시 방면으로 보았으나, 지금은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방면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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